[시론] 영웅인가, 악당인가

입력 2023-10-22 17:31   수정 2023-10-23 00:11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 앤디 워홀의 말이다. 반세기 전의 예견은 소셜미디어 시대에 현실이 됐다. 그러나 명성은 일시적이다. 언론과 소비주의가 주도하는 대중문화에서 명성은 쉽게 얻고 버려진다. 심지어는 순식간에 악당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스페인축구협회장은 지난 8월 여자월드컵 시상식에서 여자 선수에게 강제 입맞춤을 해 글로벌 밉상이 됐고 결국 사퇴했다.

1975년 9월 하순 전직 해병대원 올리버 시플은 암살범으로부터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생명을 구해 순식간에 영웅이 됐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 요청에도 언론은 그가 동성애자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충격을 받은 부모는 그와 의절했고 정신적·신체적 건강이 악화한 그는 47세에 요절했다. 언론의 과도한 관심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불인정하는 사회적 상황이 영웅을 파멸시킨 것이다.

최근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가치의 변화로 많은 역사적 인물이 악당으로 추락했다. 촉매제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경찰관이 목을 눌러 살해하는 장면을 찍은 휴대폰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자 인종차별과 식민주의 비판 운동이 일어났다.

도처에서 역사적 인물이 굴욕을 당했다. 독립선언서를 쓴 미국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의 동상이 철거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 총사령관이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도 철거됐다. 아프리카 가나대학에서는 비폭력 저항운동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을 인종차별을 이유로 철거했다. 영국에서는 의회 광장에 세워진 윈스턴 처칠 동상의 철거 캠페인이 벌어졌고 마거릿 대처 총리의 고향에 있던 동상은 훼손됐다. 콜럼버스도 원주민 대량 학살을 이유로 재평가되고 있다.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동상과 기념비가 사라졌고 ‘콜럼버스 데이’는 ‘원주민의 날’로 대체됐다.

‘원폭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눈부신 업적에도 이념 논쟁으로 몰락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조기 종식함으로써 많은 인명을 구했다. 한국의 광복도 앞당겨졌다. 핵무기의 상호확증파괴(MAD) 전략이 역설적으로 강대국 간 핵전쟁을 막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세계는 핵군비 경쟁의 시대로 진입했다. 올해 2월 러시아는 미·러 간 유일한 핵군축 협정인 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했고 핵위협을 거듭해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중국은 핵전력을 확충하고 있다. 우리도 북한의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현실이 됐다. 신기술 발전과 인공지능으로 ‘파멸의 연쇄반응’이 도래할 것이라는 공포와 함께 그에 대한 평가는 진행 중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소환되고 재해석된다. 누구도 역사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술 발전, 소통과 상호 연계성 증대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는 더 빠른 속도로 확대될 것이다. 특히 역사가 인권, 자유, 관용 등 보편적 가치와 존엄성을 위해 꾸준히 진보해왔음에 비춰 인권 침해에 대한 평가는 가혹할 것이다.

인간은 시대정신과 환경의 산물이다. 개인의 사고와 행동은 불완전하고 복합적이다. 평가 기준인 시대적 가치는 가변적이다. 정치적 양극화 시대에 상대편을 악마화하는 오류도 범하기 쉽다. 역사적 인물 평가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이탈리아 역사가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처럼 과거는 현대인의 선택과 필요에 따라 쓰이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개인은 역사를 만들 수는 있으나 평가는 오롯이 후대의 몫이다.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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